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민국 부통령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원래 [[한국]]은 [[광복]] 이후 [[대한민국 정부]]를 재건할 때, [[대통령제]]를 도입할 것인지 아니면 [[내각제]]를 도입할 것인지에 관해 의견이 많았다. 한국 정치사에서 계속 지적되는 [[아이러니]]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데, 당시 대통령제 하에 [[국무총리]]를 둘 것이냐 말 것이냐, 대통령 한 명만 둘 것이냐, 내각제를 할 것이냐 등등에 대한 [[토론]]이 길게 이어졌다고 한다. 헌법 초안은 [[이승만]]을 포함한 모든 정파들이 동의한 의원내각제를 채택했는데, [[1948년]] [[6월 15일]] [[이승만]]이 돌연 기초위원회에 나타나 [[의원내각제]]를 [[대통령제]]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였다. [[7월 12일]] 헌법을 제정, [[7월 17일]]에 공포하였으며 [[7월 20일]] [[제헌국회]] 의원들의 [[간접선거]]에 의한 [[제1대 대통령 선거]]로 이승만 후보(제헌국회 의장)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. 이는 사실상 정치적 기반이 허약한 이승만이 [[대통령제]]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음을 인지했기 때문이다. 그래서 결국 한국은 정/[[부통령]]이 존재하고 [[국무총리]]가 존재하는 혼합형 정치체제가 되었다. 대한독립촉성회의 [[이시영(정치인)|이시영]]이 초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어 1948년 7월 24일 취임하였고, 이후 제5대 부통령 선거에서 [[이기붕]][* 당시 장면 부통령의 암살을 시도하려다 실패로 돌아간 [[장면 부통령 저격사건]]의 시초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.]이 [[장면]]을 이을 5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이 선거는 '''짜고 친 [[3.15 부정선거|부정선거]]였다.'''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분노한 국민들이 [[4.19 혁명]]을 일으켜 이승만 정권과 [[대한민국 제1공화국|제1공화국]]을 몰락시키고 [[대한민국 제2공화국|제2공화국]]을 열었다. 그리고 이 이후 부통령제가 폐지되어 현재까지 시행되지 않고 있다. 상술한 대로 부통령이 겸임하도록 되어 있었던 참의원 의장은 [[대한민국 제2공화국|제2공화국]]에서 부통령제가 폐지된 이후에야 비로소 참의원이 구성되면서 같이 생겨났다.[* 이때에는 지금의 [[단원제]] [[대한민국 국회의장|국회의장]]이나 당시의 [[민의원]]([[하원]]) 의장처럼 참의원 의원들 중에서 선출되어 의원직과 겸임하도록 했다.] 그리고 그나마도 1년도 안 돼 [[5.16 군사정변]]으로 국회가 양원 모두 해산되면서 같이 소멸되었다. 그리고 이후 헌법에서는 아예 [[양원제]]를 규정하지 않고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